16세기 말 중국에서 선교한 마태오 리치 신부와 예수회원들은 유교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효도의 표현이라 보고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가 선교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미신적 행위로 보고 반대하였습니다.

도미니코회가 문제를 제기하자 1645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예수회가 자신들의 선교원칙을 교황청에 설명하자 1656년 교황 알렉산더 7세는 다시 중국에서 예수회의 선교방침을 허용하는 훈령을 내립니다. 이런 결정에 도미니코회가 또 이의를 제기하자, 1669년 교황청은 제기된 문제와 환경에 따라 인노첸시오 10세의 훈령과 알렉산더 7세의 훈령이 둘 다 지켜져야 한다고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 후 이것이 다시 문제가 되자, 오랜 검토 끝에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조상 제사를 금하는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클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며 이 문제에 관한 논란을 금하고, 불복하는 자는 엄한 벌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백 년 동안 계속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神主)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효와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사회에 커다란 충격이요 파문이었습니다. 온 조정이 들끓고 상소가 빗발치듯 하였으므로 정조 임금은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학을 금지시키며 서학 책을 불태워버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신해박해). 천주학을 하는 사람들은 부모도 모르는 짐승의 무리로 낙인 찍혔으며, 기존 윤리질서와 사회체제를 파괴하는 불온세력으로 몰려 백 년 동안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관용적인 조치를 내릴 때까지 조상제사 문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극동 선교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958년 한국 주교단은 ‘한국교회 공동 지도서'에서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를 허용하였습니다.

유교가 강조하는 효의 정신은 생명의 근원인 부모님과 선조께 감사의 보답을 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근본에 보답하는 보본(報本)과 그 은혜에 감사하는 보은(報恩)의 마음에서 비롯된 효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계속되어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 섬기듯이 함'(중용 19장)으로 이어지며, 특히 제사를 통하여 실천됩니다.

그러므로 조상제사의 목적은 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자녀로서 생명의 근본인 부모님과 선조께 보본과 보은을 계속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 돌아가신 조상님이 와 계신다고 믿고 절하면 그것은 분명히 미신 행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생명의 근본을 재확인함으로써 부모님과 선조와 하느님께 더욱 효성을 드리기 위함이요,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선조와 일치를 느끼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이중섭 신부님 (청주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