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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Lk.6.2)
제1독서 코린토 1서 4,6ㄴ-15
복음 루카 6,1-5
나
는 민석이가 훔쳐온 체육복을 대신 팔아줬다. 당시 학교 5층에 체육복 판매업체가 들어와 바깥 문구점보다 싸게 옷을 팔고 있었다.
누군가 체육복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며 환불을 요청하자, 업체는 두말없이 돈을 내줬다. 소문이 학교에 순식간에 퍼졌다. 체육복
도난사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민석이가 나에게 훔친 체육복을 내밀며 “나는 한 번 환불해 얼굴을 알 수도 있으니 나대신
팔아주면 3만1000원 가운데 1만5000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1만5000원을 벌었지만, 우리의 잘못은 곧 들통 났다.
나를 포함해 6명이 적발됐고,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다음 주로 예정돼 있던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3월 31일, 결국
나는 민석이와 함께 학교 선도위원회에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반성문을 쓰고 무릎 꿇고 빌었다. 어머니도 학교로 찾아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빌었다. 소용없었다. -한겨레신문, 2010.09.02일자-
신문의 기사 한 토막이었습니다. 1만5000원 때문에 퇴학을 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사연이었지요. 물론 체육복을 훔친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으로 퇴학이라는 엄청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꼭 퇴학을 통해서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작은 것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개개인들도 이러한 모습을 쫓아서 용서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들과는
정반대로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많은
잘잘못 속에서도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용서를 이렇게 가득히 받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사랑은 하지 못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하면서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말합니다. 지금 같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노동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안식일이 주님의 날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동을 금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노동
자체에 중점을 두고서, 왜 일했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일인 사랑과 용서는 도저히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판단을 할 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장 근본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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