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6주일 (루가 16,19-31)
사람과의 관계가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고,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좋지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지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는 삶을 통해서 깨닫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와 라자로가 등장합니다. 근데 부자는 죽어 저승에서 불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승에서 불의 고통을 받았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부자가 남에게 해를 끼쳤다든지, 큰 죄를 지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부자가 이러한 고통을 받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해답은 아브라함의 말에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부자는 좋은 것들을 받았기 때문에 저승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온갖 복을 다 누렸기 때문에 저승 불의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것들을 받았던 것, 온갖 복을 다 누렸던 것이 저승 불의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요.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 복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현명한 지혜 복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재주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건강한 신체의 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모두 복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개발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우리는 이러한 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복을 선물로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각자의 복을 서로 나눔으로써 모두가 풍요로운 복, 은총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신의 온갖 복을 자신만을 위해서 마음껏 누렸다고 합니다. 여기에 부자의 잘못이 있습니다. 부자는 나눔이 없었던 것입니다.
라자로는 부자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고 했습니다. 나눔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나눔에서부터 큰 사랑이 시작됩니다. 조그마한 나눔 하나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죽어서야 이러한 조그마한 나눔의 위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의 손가락에 묻은 물 한 방울을 원했습니다. 이 한 방울의 물이 자신의 고통을 크게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손가락에 묻은 물 한 방울. 하느님의 신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신비는 큰 기적 같은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일상의 나눔에 있습니다. 조그마한 나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엄청난 기적을 보더라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나눔의 위력을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눌 때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작은 나눔을 통해 하느님의 큰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시간들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멘! 인간관계에서는 작은것에 감동하고 작은것에 화가나서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복을 받았사오니, 저희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크리스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